1945년 8월15일 광복과 함께 교회도 새 아침을 맞게 되었다. 당시의 시대상황은 몹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이북에서 내려오는 많은 교인들을 맞고 돌보는 일에 세심한 배려를했다. 어려운 시대 상황이었지만 교우는 늘어갔고 교회는 전도와 지역봉사에 힘썼다.한글을 가르치기도 하고 예배당을 결혼식장으로 무표 제공하기도 하며 많은 부흥을 이룰수 있었다.
1950년 6월25일 당회는 늘어나는 교세에 어울리는 대교회당을 짓기 위해 50만원에 교회 부지를 매입하기로 결의하고 교회가 왕십리 일대의 선교센터로 웅비할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그날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많은 교우들이 고초를 겪게 되었다.전쟁중에 1951년 1. 4후퇴로 부산에 내려간 교우들 중 연락이 되던 교우들이 이정로목사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서울에서는 1952년 7월부터 몇명의 교우가 어지럽게 흩어진 교회당을 정리하고 예배드리기시작하였다. 무학교회의 서재신 목사가 성동관내 교회복구목사로서 시무하였다.
전쟁이 끝나가면서 점차 피난갔던 사람들이 서울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왕십리교회의 교인들로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1953년 왕십리교회는 교인수300명을 헤아리는 대교회가 되었다. 그런데 1940년에 부임하여 일제강점기와 6. 25전쟁을 거치며 교회를 이끌어 왔던 이정로목사는 이미 70세의 고령이 되었고 신병의 악화로 더 이상의 목회활동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에 당회는 1953년 6월 이정로목사를 원로목사로 추대하고 서재신목사를 제4대 담임목사로 위임했다.
이제 교회는 본격적으로 새 교회당 건축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화폐개혁과전쟁으로 교회부지대금이 50만원에 계약했던 금액이 50만환을 지불하게 되었고 성동구청으로부터 상왕십리동 303, 304, 348번지 소재 대지 약450평을 교회부지로 불하받았다. 새 부지를 구한 교회는 건축비의 부족으로 교회당 건축에 바로 들어가지 못했지만 1956년 4월 교회는 자력으로 건축을 하기로 하고 6월17일 상왕십리동 304에서 교회당 신축을 위한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새벽기도회 후에 많은 교인들이 무거운 돌을 운반하고 가마니에 흙을 나르는등 교회당 건축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57년 4월21일 신축교회당에서 감사와 감격에 넘친 입당예배을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